민주주의 저력을 보여준 NASA 프로젝트(조선일보) 이저호 65년간 태양계 탐사

1961년 2월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한 달 만에 미 항공우주국(NASA) 국장에 제임스 웹(James Webb)을 임명한다.

재무부 예산국장을 거쳐 국무부 차관까지 지낸 그는 전형적인 관료였다.

우주에 대한 지식이 깊지 않았던 그가 발탁된 것은 우주 개발에 행정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57년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해 우주경쟁이 벌어졌지만 미국은 여전히 소련에 뒤처져 있었다.

이후 더욱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에 성공하다.

집권 초기 케네디 민주당 정부는 초조했다.

앞서 스푸트니크 쇼크 당시 우주개발에 손을 놓고 있다며 공화당을 공격했지만 민주당 집권 후 소련이 더 큰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유리 가가린 우주비행 이틀 뒤인 4월 14일 미 백악관은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제임스 웹은 소련을 단숨에 추월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인간을 한 달에 보내자는 것. 하지만 필요 예산이 380억달러에 달한다는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시 미국 정부의 금 보유량을 합쳐도 178억달러어치였다.

NASA 연구원들조차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제임스 웹은 가능하면, 아니 가능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는 기술이나 예산이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핵심이라고 봤다.

어렵고 복잡한 과제일수록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교체되는 것이고 같은 정권이라도 대통령이 바뀌면 정책이 바뀐다.

과학자들이 회의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제임스 웹은 달랐다.

민주국가가 이것이 가능해야 독재체제나 통제국가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이에 깊이 공감한 케네디는 회의적인 여론에도 제임스 웹의 손을 들어줬다.

1961년 5월 25일 케네디는 인간을 달에 보낸다고 선언한다.

인류 최대의 과학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이해관계가 얽힌 부처를 설득해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느슨하고 분산된 NASA 조직의 재정비도 필요했다.

이 모든 과정에 제임스 웹이 있었다.

그는 여론도 꼼꼼히 살폈다.

1962년 2월 20일 존 글렌이 미국인 첫 우주 비행에 성공해 스타가 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존 글렌을 언론에 드러내 소련 못지않은 NASA 이미지를 구축한다.

우호적인 여론에 예산을 호소하자 의회는 만장일치로 화답했다.

모두가 달에 갈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엄청난 국민 세금이 들어간 프로젝트가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폴로 계획으로 빠듯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다른 행성 탐사를 병행했다.

어렵게 얻은 성과가 산업으로 확장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금성과 화성 탐사를 위해 마리너(Mariner) 계획을 지원하고 중단된 파이오니아(Pioneer) 계획을 되살려 목성과 토성을 탐사했다.

파이오니아 계획으로 확보된 목성과 토성 자료는 매리너 계획과 결합해 보이저(Voyager) 계획으로 발전한다.

모든 것이 순탄치 않았다.

천문학적 예산 투입에도 아폴로 우주선 발사는 늦어져 1967년에야 처음 시도됐다.

그런데 이 첫 발사, 즉 아폴로 1호는 출발도 못한 채 지상에서 불탔고 3명의 우주인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여론이 급변했다.

당시 미국은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베트남전으로 국론은 분열됐고 재정은 파탄났다.

게다가 인종 간 계층 간 갈등으로 쌓인 불만은 아폴로 사고에 대한 비난으로 쏟아졌다.

달 탐사를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찬성의 2배에 달했다.

제임스 웹이 전면에 나섰다.

그는 곧바로 조사에 착수해 온갖 청문회에 불려가 사고 원인과 대책에 대해 가감 없이 증언했다.

이 과정이 언론에 노출되자 수많은 공격이 그에게 집중됐다.

그러나 이는 그가 의도한 것이다.

여론의 화살이 제임스 웹으로 쏠리게 해 NASA에 대한 신뢰는 훼손되지 않도록 했다.

그 결과 곧 달 탐사가 재개된다.

사고가 수습되고 아폴로 계획이 궤도에 오르자 1968년 10월 그는 사임한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기 불과 9개월 전이었다.

그가 되살린 파이오니아 계획은 1958년부터 1978년까지 탐사선을 발사했다.

1972년 발사된 파이어니어 10호는 2003년 임무가 종료됐기 때문에 파이어니어 계획은 45년간 지속된 것이다.

1960년 시작된 매리너 계획은 1962년 매리너 1호를 시작으로 매리너 11, 12호가 1977년 보이저 1, 2호로 이름을 바꿔 발사돼 아직 활동 중이다.

2025년 보이저호 임무가 종료되면 65년간 이어진 프로젝트가 된다.

아폴로 계획의 후속으로 1972년에 시작된 우주왕복선 계획은 2011년에 종료되었다.

39년간의 프로젝트였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그를 기리는 제임스 웹이라는 이름의 초대형 망원경이 우주로 발사됐다.

허블 망원경을 대체할 이 프로젝트는 1989년 예산 5억달러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중간에 설계가 변경되고 보완돼 32년간 97억달러가 투입됐다.

수십 년간 돈 먹는 하마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 프로젝트를 지속할 수 있었던 저력은 제임스 웹에서 비롯됐다.

여러 논의에도 NASA라는 기술적 자산이 여전히 견고한 바탕에는 이처럼 뛰어난 행정가가 있었다.

무엇보다 제임스웹의 가장 큰 업적은 한 나라가 거대한 위협에 직면했을 때 설령 이 과제를 해결하는 데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 하더라도 민주주의가 이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음을 과학으로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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